Page 47 - 월간HRD 201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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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례 새김아티스트
전각은 한자의 서체 중 가장 조형성이 짙은 전서체를 활용해 한정된 공간에 정기를 싣는 동양
순수예술이다. 정병례 작가는 공간의 한정성에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육면에 걸쳐 글씨와 그림을
입체적으로 새기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통의 답습을 거부하는 반전을 중시하며, 도구와 재료를 스스로 개발하고, 기존의 문자 위주
전각에서 글씨, 그림, 조각이 합일된 종합예술을 선보였다. 그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시공을
넘어 여러 장르를 포괄해서 물질과 정신을 새겨나가는 새김아트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더해 그는
한글을 활용한 작품활동에도 매진하며 한국인의 정체성 또한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문제의식이 제시해준 예술가의 길
정병례 작가의 예술 인생은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초
의류공장에서 우연히 접한 인장작업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던져
줬다. 그는 ‘아랫면을 넘어 육면에 걸쳐 글씨와 그림을 입체적으로
새길 수 있겠다’는 영감을 얻었고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걸어가겠다
고 다짐했다. 그 후 정병례 작가는 전각에 입문해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렇지만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어디에서도 전각을 현대미술로 접근하는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고
자 저는 다양한 도구와 재료를 스스로 개발해야 했습니다. 현대 판
화에서는 보통 5cm의 롤러가 사용되지만 저는 1cm의 롤러를 제작
해 활용했습니다. 또 판화잉크나 인쇄잉크를 활용해서 다양한 색깔
의 전각화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주 작은 문양에서부터 큰
문양까지 편리하고, 선명하며, 다채롭기도 하고, 실패율이 제로에
가까운 양질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정병례 작가의 작품은 중국에서 유래된 흑백 탁본에서 컬러 탁본의
반전을 낳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 그는 한글을 활용한 작
품활동에도 매진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물론 한
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정병례 작가는 한글이 한자와 비
교했을 때 작품성에서 밀릴 이유가 전혀 없으며, 중국을 모방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찾기 어렵다고
역설한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전각작품은 한자 위주였습니다. 물
론 저도 여전히 한자를 종종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나는 누구인지’를 찾으며 제 사상과 철학을 작품에
▲ 하늘땅사람물불바람(세종대왕), 2009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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